수행이란 본래의 성性과 명命을 회복하는 것
그러면 태을주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태을주가 무엇인가를 살피기 전에 먼저 수행법의 가장 원론적인 것을 살펴보자. 수행이란 무엇이며, 수행법은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수행이란 인간의 몸을 통해 인간 생명의 시스템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이 이 세상에 오기 전, 내 생명의 본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행을 한다. 그러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수행은 아까 내가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닦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막연하다. 내 몸 생명의 구조에서 볼 때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에서 전하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 있다. 그것을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불교의 수행법이든, 유교의 수행법이든, 도교의 수행법이든, 기독교의 수행법이든, 생명의 근원으로 복귀하는 문제에 대한 것은 단 두 글자로 요약된다. 그것이 성性과 명命이다.
성性은 본성本性을 말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본래 모습, 그 큰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명命은 무엇인가? 명은 생명 명 자다. 또는 목숨이라고도 한다. 이 명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성과 명은 좀 대조적인 성격이 있다.
자, 구체적으로 성은 무엇이며 명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몸으로 수행할 때 성과 명이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내 마음 속에서 내가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왜 성과 명인가? 수행이란 궁극으로 들어가면 성과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동양문화의 주제가 되는 어구가 있다. 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다. [주역]<계사전>에 나와 있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일음일양지위도, 한번은 음 운동을 하고 한번은 양운동을 한다. 우주의 가장 큰 길이 하늘과 땅의 길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하늘 땅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인간세계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것도 일음일양이다.
그런데 인간 생명, 인간 몸에는 일음과 일양이 다 있다. 이것은 혼음혼양混陰混陽이라는 뜻이 아니다. 日月之氣 하에서 태어나 음양이 혼잡하게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음진양眞陰眞陽, 참 음과 참 양이다. 그 진음진양이 우리 몸 속에 있는 성性과 명命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에 있는 생명이 음양적인 두 가지 면, 가장 궁극적인 근원인 성과 명은 우주 생명의 길, 변화의 길인 도의 현상적인 두 갈래 면이다.
그러면 무엇이 음이고 무엇이 양인가? 그것은 우리가 수행을 해 봄으로써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수도를 하면 누구든지 빛을 체험한다. 아주 확연하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마음이 가라앉고 잡념이 없어지면서 수행이 집중적으로 잘 될 때가 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있는 것에 빠지지도 않고 없는 것에 빠지지도 않고, 유도 무도 아니면서, 너무도 평안하고 내 몸의 안과 밖 구분이 없이 확 열려서 평안할 때가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대우주 자체와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중화中和다. 그 때 밝음이 열린다. 그 밝은 모습,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이 성性이다. 이 밝음은 양이다. 진양眞陽이다. 이 양은 밝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기 쉽다. 반면에 명은 음이다. 진음眞陰이다. 이 우주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 그것은 저 맑은 가을하늘 또는 봄날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환하다. 하지만 눈부신 것이 아니다. 음광이다. 그러면서도 양광 못지않게 밝다.
성은 양이고 명은 음이다. 그런데 명이 더 이해하기 어렵다. 상제님께서 인간의 몸 속에는 혼과 넋이 있다고 하셨다.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된다. 그러면 혼은 양이다.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가 된다. 혼이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는 것은 인식하기 쉽다. 그런대로 경험을 한다. 밤마다 인간의 혼이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잖는가. 그것이 꿈이다.
그런데 넋은 이해가 잘 안 된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보면 무덤으로 넋이 들어가고 나온다. 무덤가에서 해떨어질 때 보면, 하얀 소복입고 다니는 것처럼 걸어나온다. 쉽게 얘기하면 정말로 맑고 하얀 아지랑이처럼 나온다. 이 넋과 같은 것이 명이다.
그런데 인간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본래 모습, 내 본래의 생명력인 성과 명은 하늘 땅과 같다.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엄마와 더불어, 천지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할 때 성과 명은 하나다. 즉,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몸을 받을 땐, 내 생명의 원초적인 가능성, 내 생명력은 우주와 같다. 그 땐 모체와 더불어 복식호흡을 한다.
그러나 엄마 몸에서 나와서 탯줄을 끊는 순간, 인간적인 호흡으로 돌아가 버린다. 가슴호흡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본래 우주와 하나인 성과 명이 둘로 분리된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적인 어둠에 휩싸인다. 눈 뜨고도 이면의 세계를 전혀 못본다. 이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만큼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내 마음의 근원인 성이 후천적인 성으로, 어둠의 세계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또한 하늘같은 무한의 생명력인 내 명이 불과 몇 십년 살다가 병들어 죽는 유한의 명자리로 떨어진다. 그 때문에 온갖 인생의 시련, 고난의 파도, 역경과 슬픔, 질병 속에서 살다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성과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근원인 성과 천지와 같은 내 본래의 생명력인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사실 수행이란 인간으로서 더 이상이 없는 행위다. 수행이 아니면 내 생명이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원시반본의 문제로 볼 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사업하고 인생을 즐기거나, 인간적인 꿈을 이루거나, 정치나 경제, 사업이나 학문, 또는 예술이라는 어떤 명분으로 일한다 해도, 그것은 전부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다.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을 사는가? 인간으로 태어난 궁극 목적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과 명을 닦는다는 것을 유형적으로 얘기하면 우리 몸에서는 정精의 문제다. 정이란 남자의 정자, 몸에 있는 호르몬, 골수라는 개념을 포괄하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도 똑같다. 난자나 신장의 정수, 오장육부에 다 들어 있다.
남녀 불문하고, 정의 기능에 의해 오장육부가 돌아간다. 정이 충만하면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푹 자고 몸이 팽팽 잘 돌아간다. 병에도 안 걸린다. 하지만 정이 파괴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단명하거나 온갖 병이 들고 천지에 사마가 날 뛴다.
그런데 무형적으로 성, 명, 정을 닦는다는 것은 성, 명, 정을 다스리는 운전자인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불가에서는 청정심을 얘기한다. 맑고 깨끗한 마음, 청정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갈라지고 혼탁한 마음, 번뇌망상, 고달프고 괴롭히는 마음은 죽음의 길이다. 어둠의 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타락은 마음이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져 뿌리를 못내리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유혹에 빠져서 사물을 바르게 인식 못 하는 것이다. 정신이 갈라져서, 자기의 정기를 빼앗기고, 자기 생명이 자기 주인노릇을 못하고 노예화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청정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나의 근원에 머무는 참마음을 말한다. 본래의 내 생명의 빛의 세계, 우주의 대 광명인 성, 본래의 성에 머무는 것, 내 마음의 근원인 성에!
여기서 성性과 심心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마음의 근원이 성이다. 마음으로 작동하기 이전, 발현되기 이전 본래의 근원이 성이다. 성은 본체이고 작용해서 드러나는 게 마음이다. 또 구체적인 마음이 완전히 드러난 것을 정情이라고 한다. 정情은 눈으로 본다, 듣는다, 마신다고 하는 현상적인 의식 작용이다. 신身의 작용이다. 또 마음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과 정의 주인노릇을 한다.
마음은 무형이다. 어떤 공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느낌의 세계다. 내가 삶속에서 첩첩으로 공부하는 중에, 순간적으로 ‘야, 그렇구나!’ 하고 깨달음이 오면 의식이 확 터지면서 기쁨이 샘 솟는다. ‘아! 생각을 잘못 했었구나. 내가 이 세상을 잘못 봤구나.’ 이렇게 순간적으로 한 생각 바뀌어 버리면, 몸에서 희열이 솟아나면서 생명의 건강을 되찾는다. 본래의 명, 생명력을 순간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메시지를 잘 받으면 일주일 만에 죽는다는 사람이 몇 달 더 살수도 있고 몇 년을 더 살 수도 있다. 천지의 생명을 회복하므로, 생명세계에 기적이 일어난다. 이렇듯 우주와 같은 본래의 내 생명력이 유전자를 통해 발동된다. 내 몸 속에 있는 우수한 유전자들의 스위치가 열려서, 거기서 무한의 생명력이 작동되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 자기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그생각은 합리적인가? 가연 바른 생각인가? 이치를 벗어나지는 않았는가? 헛된 욕망은 아닌가?’
이런 것에 곰곰이 들여다보고, 자기와 대화하고 자기자 신을 깊이있게 근원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한 참회의 생활이 중요하다. 큰 관심을 갖고 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게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이 참된 길인가?’ 에 대해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그러면 마음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 닦는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인가?
혜능이 나무꾼 노릇을 하다가 절간에 가서 보니 신수神秀가 개소리를 써 놓았다. 닦아서 제대로 빛깔을 내야 한다고 시를 걸어놓았다. 혜능이 보기에 웃기는 얘기 아닌가! 깨진 놈이 보면, 본래 바탕이 맑은데, 원래 깨끗하고 대우주적인 광명으로 꽉 차 있는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또 우리의 마음 바탕이 실체가 아닌데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닦을 대상이 없다.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 의식이 성숙되어야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마음 닦는 것을 성과 명 닦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증산도 후천선경의 개벽문화에서 보면 성과 명은 정精으로써 닦는 것이다. 성이 근본이다. 성은 무형적인 것이다. 그리고 유형적인 것이 있다. 그게 명이다. 현실적으로 성은 마음으로 작용하고 이 마음은 기와 일체가 된다. 또 명을 닦는 것은 내 몸을 닦는 것이다. 명은 내 몸의 기로 작동되는 것이다. 곧 내 생명력을 기른다는 것은 기를 보충하고 회복하는 것이고 기를 맑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공부법으로 보면 내 생명의 기반이 되는 성명정性命精, 세 요소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인 작용 요소로 보면 심기신心氣身이다. 마음과 기와 몸을 닦는 것이다. 내 몸을 닦는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정을 닦는 것이고 마음 닦는다는 것은 마음의 뿌리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 하늘 땅의 무한의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 몸의 기를 닦는다는 것이다. <종도사님, 도기 130년 1월, 서산지역 순방>
(* 성명정 수행에 관한 종도사님의 이런 고귀한 말씀을 하늘 아래 또 어디에 가서 듣겠습니까? 역사 이래 이런 말씀을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인생의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증산도 공부를 발심해보시길 바랍니다~) * 글을 싣는 순서 : ① 수행이란 본래의 성性과 명命을 회복하는 것 ② 수행할 때 호흡을 어떻게 고르게 하는가? = > http://blog.naver.com/gnbone/220839360974 ④ 증산도 수행은 무형의 마음과, 유형의 정精을 닦음 => http://blog.naver.com/gnbone/220839532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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