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지혜의 글

심청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심청전 비틀어 보기)

머털도사 오경준 2016. 2. 4. 18:06

심청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심청전은 춘향전,흥부전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읽히는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이다.

심청전의 배경은 송나라 시대 황주 도화동이며 심청이 가난한 심봉사의 딸로 태어나

7일만에 어미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동냥젖을 얻어먹으며 성장하여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시게 된다.

어느날 심봉사는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눈을 뜨게 될것이라는​ 화주승의

말을 듣고 쌀 300석을 시주하기로 약속을 한다.​

부친의 고민을 알게 된 심청은 뱃사람들에게 공양미 300석에 자신의 몸을 팔아

인당수에 던져지나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옥황상제께서 사해용왕에게 명을 내려

심청을 구하게 하고 심청은 왕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다.

심청은 부친을 찾기위해 전국의 맹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고 잔치에 참석한

심봉사는 딸 청이를 만나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이다. ​

심청전의 주제는 孝다.

또한 하느님(옥황상제)이 등장하고 ​태상노군과 사해용왕이 등장하는가 하면 심청이

용궁에서 돌아가신 모친 곽씨 부인을 만나는데 광한전의 玉眞夫人으로 등장한다.

광한전은 달속의 항아가 사는 궁전이며 옥진부인은 仙界의 선인에 대한 칭호이다.

(춘향전의 무대인 남원의 광한루 또한  천상의 광한전(廣寒殿)을 지상에 재현한 것이다)

이렇듯 심청전은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불교사상과와 도교의 색채가 함께 버무려져

있으며 한국인의 심층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 심청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1. 뺑덕어멈

2. 옥황상제

3. 사해용왕

4. 심봉사

5. 곽씨 부인(심청 母)


심청전의 주인공이 심청이며 孝를 주제로 한 소설임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보기에 심청이 없으니 한번 답을 찾아보시라!

마당놀이 뺑파전이 있으니 혹시 뺑덕어멈이 주인공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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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도사의 심청전 비틀어 보기>

심청은 본래 천상의 仙女인 서왕모의 딸로 상제에게 죄를 지어 잠시

인간 세상에 귀양을 오게 된(심봉사의 딸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가 살아나서 황후의 신분이 된것은

자신의 본래 신분을 회복한 것과 같으니 그리 놀랄만한 점이 아니다.

심청전의 절정은 아마도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일 것이다. 

심청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먼 심봉사가 눈을 뜨기까지 고난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중생이 진리의 세계에 눈을 떠나가는 開眼의 과정과 같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마침내 눈을 뜨는 과정에서 딸인 沈淸은

사실은 심봉사를 인도하는 길잡이로써 자신의 정성과 목숨을 건 희생을 통해 아비인

심봉사가 눈을 뜰수 있도록 해주는 스승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심봉사는 자신의 눈을 뜨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공양미 300백석을

시주할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공양미 300백석으로 상징되는

물질절 대가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눈이 떠질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하며 자신의 눈을 떠보려는 그의 욕망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랑을(딸) 뱃사람들에게 팔아먹게 되는 결과로 되돌아오고 깊은 절망과 슬픔에 잠기게 된다.

자신의 사랑을 팔아먹고난 뒤에야 눈을 뜨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소중한

딸(사랑) 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후 뺑덕어멈에게 속아 모든 재산을 사기당하고 마지막엔 팬티한장까지 다 도둑맞고

알몸의 거지 신세가 되고 만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생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장님이 비바람치는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이 위태롭고 힘들다.

잠시 따사로운 햇살이 몸을 비춰 얼어있는 몸을 녹여주듯 행복감에 젖게 된다 해도

항상 불안과 위태로움이 따라붙게 된다.  

심봉사가 딸을 찾아 나섰다가 개울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해지는 것처럼....

결국 사람으로써 완전한 삶을 사는것은 진리에 대해 눈을 뜨는 것 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알거지 신세가 되고나서 끼니 한끼를 걱정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놓쳐버린 딸 에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궁중연회에 참석해서 만난 딸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뜨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결국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된것은 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처음부터 공양미 삼백석의 기적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양미 삼백석 시주라는 편법을 통한 개안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것 을 잃어버리고 전재산을 뺑덕어멈에게

사기당하고 거지 신세가 되어 헐벗고 굶주리는 과정이 없었다면

또한 눈을 뜨는 절정의 과정에 이를 수 없었을것이니 중생이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고

見性에 이르는 과정은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심청이는 본래 하늘의 선녀로서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목숨을 희생시켜 가며 심봉사를 깨닫게 해야 될 책무가 주어져 있었으며

심봉사는 딸의 신분으로 온 스승의 희생과 말없는 가르침에 힘입어 마침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심청전 소설에서 심청의 부친에 대한 孝는 처음부터 100% 완성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심봉사의 딸을 향한 사람과 그리움은 2% 미달된 98%의 사랑이며

그것은 딸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희생에 대한 감동과 자신이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에게 부족했던 2%의 사랑이 채워지는 순간 자신의 눈이

떠지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심봉사 딸을 이별하고 3년 고난의 세월은 1,000일의 단련 과정이다)

중생이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고 견성에 이르는 과정이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심봉사가 궁중 잔치에 참석해서 별궁으로 모시라는 예부상서의 말을 듣고 

<내 이럴줄 알았다. 이놈 용케, 잘 죽으러 왔다. 내가 딸 팔아먹은 죄가 있는데,

이 잔치를 배설키는 천하 맹인(盲人) 만좌중(滿坐中)에, 나를 잡아 죽이려고,

배설한 것이로구나> 하고 탄식한다.

심봉사가 심황후전에 아뢰기를

<제딸이 효성이 출천(出天)하여, 애비 눈을 띄인다고, 남경장사 선인(船人)들께,

삼백석(三百石)에 몸이 팔려, 인당수(印塘水) 제수(祭需)로, 죽으러 간지가 3년이요.

눈도 뜨지 못 하옵고, 자식만 팔아 먹은 놈을, 살려두어 쓸데 있소.

비수검(匕首劒) 드는 칼로, 당장에 목숨을 끊어 주오.>

심봉사가 눈을 뜨기직전 마지막 보인 모습은 자신에 대한 깊은 참회와 모든 것을

내려놓은 無心의 경계이다.


심봉사가 눈을 뜨자 그 훈(熏)김에 만좌(滿坐) 맹인(盲人)이 모두 눈을 뜬다.

(이는 한 중생이 눈을 뜨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만백성이 모두 진리에 눈을 떠서

地上仙境의 후천낙원이 펼쳐짐을 보여준다.

소설속에서 모든 소경이 눈을 뜬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눈을 뜨는것이 아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심봉사가 겪었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미륵경에 미륵불은 이세상의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어 용화낙원을 건설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이 소설의 바탕에는 이 모든 기적과 사건이 일어나도록 안배하는 옥황상제

하느님의 손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이렇듯 우리민족의 심성과 심층의식에는 하느님(옥황상제)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인가 하느님(하나님)은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에서

외치는 이방의 神처렴 여겨지는 하느님(상제님)이란 언어에 대한 왜곡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상제님)이란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신앙해왔던

믿음의 대상이며 일상의 생활속에 늘 함께하는 존재였다.


                 ♣                  ♣                 ♣


1

상제님께서 평소 성도들과 노실 적에 종종 ‘가구(假九) 진주(眞主)치기 노름’을 하시니라.

2

하루는 상제님께서 “다 터라.” 하시고 투전을 들고 탁 치시며 “○씨가 판을 쳤다!” 하시고 다 거두어들이시며

3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다 죽는다. 잘못하다가는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이니라. 알겠느냐?

4

도로 본자리에 떨어진단 말이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니 봉사 잔치란 말이다.

5

아는 사람은 알지만 누가 가르쳐 주랴. 제가 알아야 하느니라.” 하시고

6

또 말씀하시기를 “끝판에 ○씨가 있는 줄 몰랐지. 판 안 끗수 소용 있나. 끝판에 ○씨가 나오니 그만이로구나.

7

나의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라. 나의 일은 판밖에 있단 말이다. 붉은 닭 소리치고 판밖 소식 들어와야 도통판을 알게 되고, 도통판이 들어와야 나의 일이 될 것이다.” 하시니라.

8

경학이 여쭈어 말하기를 “도통판은 어디 있습니까?” 하니

9

말씀하시기를 “가르쳐 주어도 모르리라. 똑똑히 들어 봐라.

10

전라도 백운산으로 지리산으로 장수 팔공산으로 진안 운장산으로 광주 무등산으로 제주 한라산으로 강원도 금강산으로, 이처럼 가르쳐 주니 알겠느냐?

11

알기 쉽고 알기 어렵고 두 가지라. 장차 자연히 알게 되리라. 내가 가르치니 알게 된다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 증산도 도전 6편 74장 -


<봉사잔치>라는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심청전의 몇몇 부분을 들여다 보았다.

<모르는 놈은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라는 말이 있듯이 스스로 깨치려

노력하지 않으면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없다.

또한 눈앞의 현실에만 매달려 허우적거리거나, 마음닦는 일을 무슨 취미활동이나 

건강과 힐링을 위한 여가 활용 정도로 가볍게 접근하려 한다면 처음부터 시작을

안하는 것이 좋다.

공양미 300석을 바치고 눈을 뜰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6년 2월 4일 입춘절에... 천지철학관에서 머털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