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때 22개 계열사를 이끌며 재계 순위 10위, 자산규모 11조원이 넘는 동아그룹을 이끌어 왔던 그룹 총수였다. 10평도 채 안되는 작은 사무실 한 구석의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봤을 때 초라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얗게 센 그의 머리는 숱이 많이 줄어 있었다. 인사차 내민 그의 손에는 握力(악력)을 느낄 수 없었다.
23세에 동아콘크리트 사장을 시작으로 30대에 동아그룹의 주력기업인 동아건설·대한통운을 맡아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등 중동지역을 휘저었고, 40대에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라 불리던 리비아 大水路(대수로) 공사를 현장지휘하며 세계적인 건설경영인으로 우뚝 섰던 뚝심과 패기의 ‘최원석’. 그는 유명 연예인과 미모의 아나운서를 부인으로 맞아 세간에 숱한 화제를 뿌린 풍운아이기도 했다.
그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를 통해 10년을 추적해 온 그룹 해체의 불법성을 적나라하게 털어놓았다.
최원석 회장은 1998년 5월 동아그룹 회장직에서 사실상 쫓겨나면서 1000억원대의 개인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이후 지금까지 40여 건의 민형사 재판을 받아왔다. 10년 동안 그를 옭아맨 재판은 한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1998년 7월 가택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검찰 조사를 수십 번 받아왔고, 동아건설이 동아생명의 유상증자에 참여한 것은 배임이라 하여 2008년 4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서울고법 파기환송심)을 선고받을 때까지 동일한 죄목으로 7번 법정 선고를 받았다. 2004년에는 법정 구속돼 6개월간 구치소 경험도 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
형사재판과 함께 진행된 34건의 민사재판은 그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8월 15일 건국 60주년을 맞아 특별사면·복권되면서 그나마 여유를 찾았지만, “회사에 끼친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원고 측의 야속함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한다.
소송을 제기한 측은 다름 아닌 부친(崔竣文 전 동아그룹 명예회장·1985년 작고)과 자신이 평생을 바쳐 키워온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의 新(신) 경영진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舊(구) 경영진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라”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최 회장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최원석 회장과의 인터뷰는 옛 동아그룹이 설립한 동아방송예술대학의 학교기업 ‘DIMA엔터테인먼트(서울시 청담동 소재)’ 사무실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인터뷰에는 동아건설 퇴직 임직원단체인 ‘동아건우회’의 宋連鎬(송연호) 사무총장이 배석했다.
최 회장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모든 것을 털어놨다. 1998년 회사 경영권과 재산을 박탈당했을 때의 심정을 얘기할 때는 격정적으로, 실패한 기업가의 입장을 얘기할 때는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농담을 한마디씩 던지곤 했는데 ‘전 재산을 잃었지만 삶의 희망까지 잃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 회장과의 첫 만남은 朴容旿(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이뤄졌다. 그는 “박 회장과 절친하게 지냈었는데 뉴스를 통해 불행한 소식을 들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기분이 착잡하다”고 했다.
걷고 등산하며 과거의 기억 지워
동아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1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전화통신공사를 수주했다. 1977년 사우디를 방문해 당시 칼리드 국왕과 악수하고 있는 34세의 최원석 회장. |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다른 대기업 회장처럼 번듯한 회장실에서 인터뷰를 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요” 하고 인사를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방에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지난해 사면복권됐는데, 과거 친분이 있는 분들을 다시 만납니까.
“아무도 안 만나요. 제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 현실을 받아들여야죠. 괜히 연락을 하면 ‘도와달라’는 식으로 들릴까 봐 스스로 피해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많이 걸어요. 등산도 가끔 하고요.”
―그렇게 하면 힘든 기억들이 잊히나요.
“그동안 많이 잊었고, 지금도 머릿속에서 계속 지우고 있지요.”
오랫동안 언론을 접하지 않은 탓인지 최 회장은 인터뷰 자리를 몹시 불편해했다. 그는 “검찰수사와 재판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지 질문에 답변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했다.
―동아그룹은 IMF 당시 국내 재계 순위 10위였던 대기업이었습니다. 동아건설이 추진했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Great Man-made River)는 ‘세기의 기적’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대단했는데요. 최 회장께서는 스스로 동아건설을 어떤 회사라고 정의합니까.
“정말 대단한 회사였어요. 국내 주요 발전소·댐·교량공사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해외 대형공사를 많이 수주했지요. ‘동아건설’이 갖고 있던 프리미엄은 세계적이었습니다. 대수로 공사의 경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내게 직접 브리핑을 하며 ‘1·2차뿐만 아니라 3·4·5차 공사까지 맡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요. 리비아 대수로 공사로 100억 달러를 수주했어요.”
―100억 달러면 현재 가치로 얼마 정도 됩니까.
“대략 1000억 달러 이상 될 겁니다.”
리비아 大水路 공사는 동아건설의 상징
단일 토목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최원석 회장과 동아건설의 ‘상징’이었다. 동아건설은 1983년 총연장 4200km의 대수로 5단계 공사 중 1단계 공사를 수주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 수주는 그해 세계 10大(대) 뉴스에 들어갈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최 회장은 세계적인 건설 CEO로 떠올랐다.
지름 4m, 총연장 4000km의 대형 콘크리트관을 사막의 지하에 묻고 그 속으로 강물을 흐르게 하는 대역사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비교되기도 했다. 대수로 공사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렸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공사물량과 공사기간(1983~2010년) 때문이 아니라 이 공사가 지닌 문명사적 의미 때문이었다. 이 공사는 지금까지 인류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방치해 두었던 사막을 푸른 초원지대로 개조하는, 거대한 모험이었다.
최 회장은 1991년 1차 공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통수식을 가진 후 2단계 공사도 수주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공사였습니다. 대규모 공사를 수주한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력기업인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을 컨소시엄 형식으로 구성해 그룹 차원에서 총력전을 벌였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쌓아온 동아건설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요. 멀리는 동진강 간척공사를 비롯해 우리 국토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사업을 해 왔고, 가까이로는 중동의 뜨거운 햇볕 아래 ‘세계 10대 난공사’로 알려진 ‘알주와 산악도로’를 시공했고,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걸쳐 地中(지중) 전화선을 놓는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리비아 정부가 인정한 겁니다.”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동아건설 임직원의 적지 않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의 절묘한 협력체제로 이겨냈어요. 콘크리트관을 생산하고, 생산된 관을 안전하게 운송하고, 운송된 관을 정확히 매설하는 일을 차질 없이 해 왔던 겁니다. 세계 어느 기업집단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지요.”
최 회장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34세 때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당시 칼리드 국왕과 찍은 사진입니다. 1977년 사우디에서 전화통신공사(TEP)를 진행했는데 수주액이 12억5000만 달러에 달했어요.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NP가 944달러였고 그해 수출총액이 100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국가 전체 수출액의 10분의 1 이상을 동아건설이 달성했던 거죠. 지금 생각해 봐도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당시 사우디의 TEP 공사에서 순수하게 5억 달러 이상을 남겼습니다. 그때 번 돈으로 원효대교를 만들었지요.”
門中先山도 다 빼앗겨
동아건설은 1978년부터 1981년 3년 동안 225억원을 들여 원효대교를 건설해 완공 1년 후에 국가에 무상으로 헌납했다. 공사대금 225억원은 당시로서는 대형공장을 건설하고도 남을 거액이었다.
최 회장은 “당초엔 통행료를 받아 공사비를 회수하려 했는데, 시민들이 통행료 아끼려고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시민들에게 돌려주자’ 이렇게 결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그룹은 건설업을 주력업종으로 하는 동아건설과 운송 부문의 대한통운이 그룹의 근간이었다. 동아생명과 동아증권 같은 금융회사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밖에 동아엔지니어링, 공영토건, 서원레저를 비롯해 무역·관광개발·종합환경·콘크리트 및 철구조물 제조 등 22개의 계열사를 뒀다.
―한 시절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세계를 뒤흔들다가 모두 잃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무것도 없으니 지킬 것도 없고, 도둑맞을 일도 없어 편하고 좋네요.”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재판을 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서 다 내놓았더니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검찰수사와 재판뿐이었어요. 10년 동안 그 일을 해 왔는데 이젠 진절머리가 날 지경입니다. 강산이 한 번 바뀌는 동안 검사와 판사만 만난 것 같아요. 자살할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용기가 없어 죽지 못했어요. 지금도 민사재판이 진행 중인데 개인적으로 은행계좌도 못 열어요. 그래도 先山(선산)은 꼭 찾아야 하는데….”
―선산도 빼앗겼습니까.
“네. 충남 조치원 일대에 있는 선산도 다 빼앗겼어요.”
―선산 자리가 명당이었습니까.
“명당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었겠소? (웃음) 저희 집안의 윗대 어르신들이 묻혀 있는 곳을 제가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못난 놈치고는 한참 못났지요.”
최 회장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10년 전의 일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뼈아픈 기억이겠지만, 필자 일행에게 설명할 때는 남의 일처럼 편안하게 얘기했다.
“날짜도 잊히지 않는군요. 1998년 5월 12일이었어요. 동아건설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서울은행장이 나를 롯데호텔 양식당으로 불러내더군요. 나갔더니 그 사람이 단도직입적으로 ‘최 회장 당신이 있으면 금융지원도 안되고, 김포매립지(現 인천 청라지구)도 용도변경이 안되니까 그룹 전체를 다 내놓고 나가라. 개인 재산도 몽땅 다 내놔라. 최 회장이 있으면 될 일도 안된다. 동아는 우리가 잘 살리겠다’고 했어요.”
―경영권을 내놓으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개인 재산까지 다 내놓으라는 말은 이해가 안됩니다.
“그날 그 자리에 柳成鏞(유성용) 당시 동아건설 사장이 같이 있었어요. 서울은행 측에서는 김 상무와 방 이사가 배석했지요. 재산은 물론이고 갑작스런 경영퇴진 요구에 정신이 없었어요. 金大中(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재벌해체’ ‘재벌 길들이기’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살벌한 상황이었지요.”
―당시 동아건설의 재무구조는 어땠습니까.
“그 무렵 동아건설이 재개발 민간사업에 거액을 투자한 상황이었어요. 금융기관들이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면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나 하나 때문에 그룹 전체가 날아가면 안된다. 그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주거래은행의 요구를 덜컥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동아그룹 임직원들에게 離任辭(이임사)를 한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어요. 재산도 내놓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동아건설 자산, 부채보다 1조3000억원 더 많아
1996년 리비아 본부에서 임원들을 격려하는 최원석 회장. |
이 일이 있은 직후 서울은행 측은 “채권금융기관은 동아건설에 6000억원의 협조융자를 제공키로 합의하고 최원석 전 회장에게는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주식과 부동산 등 개인 재산을 몰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일부 언론은 ‘최 회장의 사임에 외압이 작용했다’고 보도했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동아그룹의 재정상태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IMF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아 유동성 위기에 몰렸을 뿐 결코 부실기업은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재판을 받으면서도 이 부분(부실기업)만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동아그룹을 떠나기 직전인 1997년도와 정부가 전문경영인을 임명했던 1998년도 재무제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1997년 12월 현재, 그룹의 주력기업이었던 동아건설은 자산이 6조2000억원, 부채가 4조9000억원으로 자산이 부채보다 1조3000억원이나 더 많았습니다. 당시 우리가 김포매립지도 갖고 있었는데 재무제표상 1000억원으로 잡혀있었지만 공시지가는 1조원에 달할 정도였어요. 김포매립지를 용도변경하면 자산가치가 20조원에 육박한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들여다보면 자산이 훨씬 더 많았던 이런 회사를 어떻게 부실기업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국민에게는 제가 마치 회사 경영을 엉망으로 해서 엄청난 부실기업을 남기고 물러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겁니다.”
月刊朝鮮이 입수한 검찰수사기록과 회계법인의 실사자료를 분석한 결과, 당시 동아건설의 재무상황이 ‘부실’이라고 볼 근거는 부족했다. 동아건설의 분식회계를 조사한 검찰은 과거 10년간(1988~1997년) 조성한 분식금액을 대략 7000억원이라고 발표했다.
분식금액과 16~17%의 이자, 협조융자금 등을 1998년도 회계결산에 모두 반영해도 동아건설의 자산은 부채보다 5500억원가량 더 많았다. 결국 최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당시 동아건설은 부실기업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언론도 이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동아의 자금난은 2조원대의 국내 미수금 때문으로, 이 채권이 회수되면 기존 채무상환 등 정상화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회계법인의 실사작업이 현재 진행 중이나 대체로 자산이 부채를 9000억원가량 초과한 것으로 나오고 있어 재무구조는 오히려 건실한 편이다.’(1998년 5월 9일자 <한국일보>)
‘동아건설도 채권은행단이 제2차 협조융자 이전인 지난 4월 말 회계법인을 통해 실사한 결과 흑자기업으로 결론이 났다.’(1998년 5월 12일자 <국민일보>)
‘최원석 흔적 지우기’
서울은행 측이 최 회장에게 경영일선 퇴진과 사유재산 몰수를 요구할 무렵 금융계에서는 “최 회장에 대한 서울은행의 조치는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채권금융기관이 협조융자를 조건으로 대기업 총수의 개인 재산 전체를 몰수한 것은 최 회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부 다른 기업 총수는 재판에 의해 재산을 추징당한 경우가 있었지만, 재판도 하지 않고 재산을 사실상 빼앗긴 경우는 최 회장이 유일했다.
최원석 회장은 1998년 5월 20일 서울은행 측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는다는 ‘확약서’를 써줬다. 그는 개인 재산을 내놓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친께서 설립한 회사가 하루아침에 다 날아갈 것 같은 상황에 무슨 재간으로 재산을 안 내놓을 수 있습니까. 인감도 떼어줬고 계약서에 사인도 해 줬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상한 일이 벌어집디다. 검찰이 제게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더니 검찰 수사관이 장충동 집으로 들이닥치는 거예요. 가택 압수수색이 이뤄졌던 거죠. 서류란 서류는 몽땅 다 가져갔어요. 이때부터 회사 비자금, 외화밀반출, 분식회계 조사가 시작됐어요.”
얼마 후 새 경영진이 들어온 동아건설 측이 최 회장에게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장충동 집에서 빨리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때부터 동아그룹은 ‘최원석 흔적 지우기’에 나섰어요. 동아그룹을 떠난 지 두 달 남짓 되던 어느 날 20년을 살아온 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최 회장은 1998년 7월부터 검찰 수사를 받을 당시 10년 동안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지난해 사면복권될 때까지 10년간 검찰과 법원을 오가며 수없는 재판을 받아왔다. 사건의 줄거리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996년 재정경제원장관의 자본금 증액명령으로 동아생명 유상증자에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이 참여했는데 이 행위가 ‘배임’이라는 것. 둘째, 동아건설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는 것. 셋째, 대한통운의 공영토건 지급보증 사건이다.
법원은 배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했으며, 지급보증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최 회장은 유죄 부분에 대해 “재정경제원장관의 지시에 따라 유상증자에 참여했고, 기업을 운영하면서 분식회계가 필요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조목조목 반박하는 게 오히려 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고 했다.
최 회장은 회사를 떠나면서 빼앗긴 재산 중 충남 조치원 소재 문중선산과 관련해 秘話(비화) 한 대목을 들려줬다.
“당시 서울은행 이사 한 분이 동아건설 채권단 경영관리단장으로 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서울은행 측은 최 회장의 재산 중 선산은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청와대가 선산까지 다 (매각대상에) 넣으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저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청와대가 컨트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청와대가 선산까지 다 빼앗으라고 지시”
月刊朝鮮은 최 회장이 동아그룹을 떠난 지 6개월 되던 1998년 11월 6일, 최 회장과 주거래은행(서울은행) 허태남 이사, 최 회장의 법률고문인 尹昇榮(윤승영) 변호사 등이 나눈 대화록 일부를 입수했다. 이 녹취록에 따르면, 최 회장을 포함한 동아그룹의 처리방향에 대해 청와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녹취록의 일부다.
<허태남(서울은행 이사·동아건설 채권단 경영관리단장): 최근에 회장님 아시겠지만 지난번에도 회장님의 선산은 담보물 목록에서 뺐었어요. (서울)은행에서 뺐는데, 다음날 청와대에서 그냥 넣으라고 해요. 그래서 그때 회장님한테 추가로 선산을 담보로 제공받아 가지고 넣은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도 관리를 위(청와대)에서 하고 있습니다.
최원석: 허 단장님 생각해 보세요. 제가 가택수색당하고 지금 6개월 동안 앉아서 내사를 받고 있고, 외화밀반출이다 무슨 그런 의혹을 받고 있어요. 해외에서 공사를 하니까 어떻게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거는 조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또 하나는 내가 5년, 6년 동안 얼마를 썼다 등 두서너 가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길거리에 나앉아 있는데 이게.
윤승영(법률고문): 5공 때 당한 국제그룹보다 지금이 더 심합니다.
허태남(서울은행 이사): 회장님이 산소 말씀을 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두 필지를 뺐잖아요. 뺐거든요. 그 다음날 위에서.
최원석: 아까도 말했지만 국제그룹 회장도 집은 그대로 놔뒀잖아요. 지금도 살고 있잖아요. 성북동에다 살게 합디다.>
IMF 직후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재벌개혁을 내세우며,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해 온 대기업을 향해 핵심기업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속히 정리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동아그룹도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계열사였던 공영토건(주)과 동아생명(주)을 두고 마치 기업사냥을 통해 사업을 확장한 것처럼 오해를 받았다.
최 회장은 정부 측에 해명할 자신이 있었다. 최 회장의 말이다.
“공영토건은 全斗煥(전두환) 정권 당시 대형 금융사기사건이었던 이철희·장영자 어음부도사건으로 정부에 의해 半(반)강제로 떠맡게 됐어요. 그 후 공영토건을 살리기 위해 동아건설이 적자가 나더라도 공영토건은 흑자가 나도록 하청을 몰아줬어요. 그 결과 3년6개월 만에 회사를 정상화시켰습니다. 동아생명도 인수 당시 1700억원에 불과했던 자산규모를 1997년 말 현재 2조4000억원으로 성장시켜 업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동아그룹은 ‘재벌 길들이기’ 1호 기업
동아생명을 단돈 1000원에 매각한다는 비밀계약서. |
최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 한 달 전인 1998년 4월, 당시 공정거래위원회가 공표한 동아그룹의 자산총계는 11조7560억원, 부채총계는 10조400억원(부채비율 585%)이었다. 자산이 부채보다 1조7160억원 더 많았던 것이다.
당시 재계 서열 10위였던 동아그룹은 당시 재계 서열 9위인 금호그룹(2000년 동아생명 인수, 2008년 대한통운 인수)은 자산총계 11조9950억원, 부채총계 10조9750억원(부채비율 1076%)이었다. 당시 동아그룹은 금호그룹과 비교해도 부실 기업은 아니었다.
동아그룹의 주력기업이었던 동아건설은 1997년 전체 업종 기준으로 상위 16위, 건설업 기준으로 현대건설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5월 최 회장이 물러난 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다가 2000년 11월 최종 부도처리됐다. 이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1년 5월 파산선고를 받았다. 파산절차가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자산이 매각됐다.
이름만 남게 된 동아건설은 2008년 프라임그룹에 인수됐고, 작년도 시공능력평가액은 2456억원, 건설사 도급 순위 89위에 머물렀다. 동아건설 10년 만에 소규모 건설사로 전락한 것이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건국 이래 사실상 첫 與野(여야) 정권 교체였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직후 ‘재벌해체’ 운운한 것은 IMF 외환금융 위기극복이라는 목표 아래 ‘재벌 길들이기’ 의도가 들어 있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동아그룹이 괘씸죄에 걸렸다는 얘기가 팽배했다.
동아그룹은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한 ‘손보기’가 아주 쉬운 소유구조였다. 동아그룹에서 ‘최원석’ 하나만 빼내면 매각이 쉬운 상태였다. 최 회장이 경영권에서 물러난 후 동아그룹 계열사는 이리저리 팔려나갔다.
첫 번째 매각 대상이 동아증권이었다. 최 회장이 물러난 지 두 달 만에 동아증권은 당시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세종기술투자에 21억원에 넘어갔다. 동아증권 매각은 동아그룹 내부 임직원들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샀고, 이때부터 동아그룹 임직원들은 정부가 보낸 전문경영인의 회사자산 처분에 불신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증권을 인수했던 金亨珍(김형진)씨는 5개월 만에 500억원을 벌었다고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동아건설이 금융비용을 포함해 1300억원을 투입해 건설한 서원레저골프장은 1998년 11월 불과 20억원에 팔렸다. 당시 언론은 이 과정에서 수십억원의 커미션이 건네졌다고 기사화했다.
동아그룹의 헐값 매각은 계속됐다. 부천 동아시티백화점은 476억원(당시 시가 1200억원), 호주 골드코스트골프장 및 주택단지는 190억원(투입금액 960억원), 공시지가 1조원이었던 김포매립지(1256만㎡)는 6300억원 등에 ‘땡처리’됐다.
동아그룹 계열사 매각의 하이라이트는 2000년 2월 금호그룹에 매각된 ‘동아생명’이었다. 최근 月刊朝鮮이 입수한 ‘동아생명 인수에 관한 계약서’에 따르면, 1999년 연말 동아생명에 공적자금 1조1000억원이 투입되고 두 달 후 단돈 1000원에 매각됐다.
희한한 것은 계약 내용을 외부에 공개할 수 없도록 한 공개 금지 조항도 들어 있다는 점이다. 계약서 14조에는 ‘각 당사자는 상대방과 사전 협의 없이 본 계약서의 존재와 내용을 公衆(공중)에 공개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자산 매각은 자산평가자문기관과 전문가들의 조사·분석을 토대로 매각전략, 매각시점 등 공정한 절차를 통해 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함에도 동아그룹의 자산은 불투명하게 처리됐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파산”
최 회장은 1998년 5월 ‘회사를 살리려면 경영권과 재산을 다 내놓아라’라는 주거래은행 측의 요구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최 회장의 머릿속은 동아그룹의 핵심이었던 동아건설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전문경영인이 회사 책임자로 온 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진행됐지만 불행하게도 동아건설은 2000년 11월 최종 부도처리됐다. 주거래은행이 워크아웃 기간 동안 4800억원을 투입한 후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총 8200억원을 회수한 다음 부도처리한 것이다.
이후 동아건설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1년 5월 법원 직권으로 파산선고를 받았다. 사람에 비유하면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최 회장이 그룹을 떠날 당시 그룹은 물론 동아건설의 자산이 부채보다 5000억원 이상 더 많았다(회계법인 실사자료). 그러나 동아건설은 끝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동아건설이 파산되기까지 여러 기관이 관여했다. 과연 동아건설은 누구의 뜻에 의해 파산된 걸까.
최 회장은 “동아그룹은 김대중 정권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강탈당했다”고 털어놓았다.
“2001년 2월 동아건설이 법정관리에서 갑자기 청산된다고 알려졌어요. 그 무렵 10년 가까이 동아건설 외부감사를 맡았던 안건회계법인의 대표가 동향 출신으로 잘 알고 지내던 당시 청와대 고위층에게 ‘동아건설은 현대건설보다 재무상태가 훨씬 좋은데 왜 이런 회사를 없애려고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청와대 고위인사가 ‘동아 문제는 회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동아건설은 그들의 손에 의해 죽어간 겁니다.”
‘지시에 의해 지시대로 간다’
최원석 회장의 40대 시절의 모습. |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2001년 1월 삼일회계법인이 동아건설을 실사했을 때는 회사의 존속가치(회사의 사업을 계속할 때의 가치)가 청산가치(회사를 청산할 때의 가치)보다 컸어요. 그래서 파산은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보이지 않는 세력의 지시로 이자율이 14%에서 15.5%로 높게 책정됐고, 결국 파산시키는 쪽으로 삼일회계법인의 조사보고서가 작성돼 법원에 제출됐습니다.”
―회계법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저도 이해가 되질 않아요. 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삼일회계법인의 조사보고서가 법원에 제출되기도 전에 법원이 동아건설을 파산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법원이 무슨 이유로 동아건설을 없애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당시 법원이 재량권을 발휘해 이자율을 15.5%에서 2%만 내려 13%대로 적용했더라도 파산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법원이 동아건설에 대한 법정관리절차를 직권으로 폐지한 후 동아건설 법정관리인에게 회사가 항고하지 말 것을 종용해 결국 동아건설은 항고마저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건 정말 잘못된 겁니다. 나를 포함해 과거 동아건설 임원들은 동아건설 파산으로 수많은 민형사 소송에 휘말려 경제적·심리적·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아왔어요.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지금이라도 동아그룹 해체의 진상을 반드시 밝혀야 해요. 동아그룹은 DJ정권의 ‘보이지 않는 손’에 강탈당했고, 단물을 다 빨아먹은 다음 打殺(타살)시킨 겁니다. 당시 권력의 분위기를 눈치 챈 사법부는 스스로 재량권 행사를 포기했음이 분명합니다.”
인터뷰에 배석했던 송연호 동아건우회 사무총장은 2001년부터 동아건설 파산의 진실을 추적해 왔다. 그는 “동아건설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으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2001년 동아건설이 파산될 당시의 상황을 들어봤다.
―동아건설이 법정관리가 폐지되고 파산된다는 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정확한 날짜는 2001년 2월 2일 금요일 오후 3시경입니다. 당시 저는 7년 동안 해외근무를 마치고 본사 전력사업부 대북사업팀 부장으로 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파산된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본사 8층 경영기획실을 찾아가 담당부서 팀장과 기획실장에게 물었더니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당시 법원이 삼일회계법인에 의뢰한 조사보고서가 그 다음날 2월 3일 토요일 법원에 제출될 예정이었는데, 법원이 지시한 작성지침에 따라 동아건설을 청산시키는 것으로 조사보고서가 작성됐어요.”
―조사보고서가 법원에 제출되기 전에 법원으로부터 청산(파산)방침이 먼저 내려졌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곧바로 몇몇 임직원들과 대책을 숙의했고, 쉬쉬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동아건설 全(전) 임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삼일회계법인이 조사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하던 날(2001년 2월 3일) 오전 동아건설 협력업체 채권단 회장이 ‘동아건설이 청산된다’는 소식을 듣고 삼일회계법인 수석회계사에게 전화를 걸어 법원지침에 관한 사항을 녹음했는데 그게 녹취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녹취록의 핵심은 ‘지시에 의해 지시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가 청산된다는 소식은 맨 처음 어디서 흘러나왔습니까.
“삼일회계법인 회계사 다섯 명이 동아건설 본사에 상주하며 회계실사를 했는데, 이들 중 한 회계사가 2001년 1월 말 동아건설 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 본사에 퍼지게 됐습니다. 당초 삼일회계법인의 조사보고서는 동아건설을 존속시키는 쪽으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외부 지시에 의해 반대로 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송연호 동아건우회 사무총장. |
―삼일회계법인의 조사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뒤집혔습니까.
“삼일회계법인이 당초 기업의 존속가치를 계산하면서 이자율은 14.08%, 국내공사 매출채권 회수 기일은 87일을 적용했더니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더 크게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회사가 없어질 정도는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2001년 1월 하순, 외부 지시에 따라 이자율이 15.5%로 변경됐고, 매출채권 회수 기일이 87일에서 121일로 변경되면서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더 많은 것으로 뒤집어졌습니다(1943억원 초과). 이 말은 회사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 없애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이자율을 1% 올리면 존속가치가 약 1000억원 내려가고, 반대로 1% 내리면 1000억원 정도 올라갔습니다. 만일 삼일회계법인이 할인율을 13%대로 낮게 적용했다면 법원은 동아건설을 결코 파산시킬 수 없었습니다. 2001년 1월 말 당시 시중금리는 6%대였는데 동아건설에 대한 이자율은 턱 없이 높았습니다. 결국 법원은 삼일회계법인의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파산선고를 내린 겁니다.”
―2001년 1월 당시 리비아 정부가 ‘동아건설의 파산을 막아달라’고 한국정부에 강하게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법원이 동아건설을 파산시키는 쪽으로 기울자 일부 행정부 고위 관계자가 법원을 찾아가 ‘동아건설은 살려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당시 법원 안팎 사정을 보면, 법원 자체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정황이 여러 군데서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최원석 회장은 동아그룹 해체에 작용했던 ‘보이지 않는 손’과 관련해 비화를 털어놓았다.
“1998년 3월경 제 누이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당시 아태재단 이사이자 여권 핵심인물의 부인이 제 누이와 제수씨를 서울 시내 모처로 불러내 ‘최 회장님 조심해야 합니다. 이건 정권 최고 핵심부의 뜻입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기분은 나빴지만 별일 있겠나 싶었지요. 두 달 후 경영권을 박탈당하기 직전까지 제가 ‘재벌 길들이기 1호’로 찍히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는 원래 金大中씨를 안 좋아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함께한 최 회장(왼쪽). |
―‘재벌 길들이기 1호’로 찍힌 이유는 최 회장께서 당시 정권 최고위층의 말을 안 들었기 때문입니까.
“나는 원래 金大中(김대중)씨를 안 좋아했어요.”
―정치자금을 안 냈습니까.
“과거 대선이 있을 때마다 대기업별로 공식적으로 내는 돈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분한테 준 적은 없어요. 그래서인지 1997년 대선 때 내게 (정치자금을 내라는) 노골적인 요구가 없었어요.”
―月刊朝鮮 3월호에서 崔淳永(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1992년 대선 때 金泳三(김영삼) 후보 측에 100억원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DJ 측에 알려지면서 1997년 대선 당시 똑같은 액수를 요구했지만 한푼도 주지 않았다. 나는 체질상 DJ가 싫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대중씨 싫어하는 것은 나랑 똑같네요.”
―그쪽에서 자금을 요청했으면 줄 생각이 있었습니까.
“줬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내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난 후 ‘차라리 돈을 줄 걸’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쪽과 관계는 언제부터 안 좋았습니까.
“원래 민주당에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權魯甲(권노갑)씨도 감옥에서 알게 됐지요.”
―감옥 동기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많지만 거론하는 건 좀 그렇군요.”
―보통 기업인들은 회사를 보전하기 위해 여야 구분할 것 없이 보험을 드는 셈치고 정치자금을 고루 주는 게 당시로서는 상식이었는데요.
“상식이긴 한데 이건 아니더라고. 그리고 1997년 대선 때 나는 李會昌(이회창)씨를 지지했어요.”
“동아그룹 문제 해결하고 세상 떠났어야”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기업경영에 지장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안 했습니까.
“인수위 때부터 분위기가 안 좋더군요.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리비아 공사도 있고 국내에 땅도 많아서 큰 걱정은 안 했어요. 그런데 나를 회사에서 몰아내더니 끝내 회사를 파산시키더군요. 그동안 원한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회사에 복귀하려고 몇 년을 참고 기다렸어요. 동아건설 노조원들이 불도저를 몰고 내 집 앞에까지 와서 ‘복귀하라’고 시위할 때는 눈물까지 흘렸지요. 사실 그때 복귀하려 했는데 어떤 손이 작용을 했는지 안되더군요.”
―김대중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최원석 회장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몇 분이 흐른 후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동아그룹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셨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그냥 돌아가시면 안되는데….”
―그분이 살아 있을 때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회장님을 힘들게 했던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선친과는 알고 지냈는데, 나는 88올림픽 때 탁구경기가 열렸던 서울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는 코드가 정말 안 맞았습니까.
“내가 눈치가 없어서 그래요. 코드 안 맞는 사람한테도 적당히 처신을 잘해야 하는데 성격이 그러지를 못해요.”
―코드 맞는 사람한테는 잘해 줬습니까.
“물론이죠.”
―권력에 밉보여 큰 회사가 허망하게 무너진다는 사실이 이해가 잘 안됩니다.
“권력자한테 잘못 보이면 그렇게 돼요.”
―최 회장께서 수십 년간 피땀 흘려 만든 기업을 의사도 묻지 않고 매각을 할 때 권력에 대한 회한을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과거 6·25 때 완장 찬 놈이 주인을 내쫓고 자기가 주인 되려고 그랬잖아요. 동아그룹의 일부 사람들도 그랬지요. 그런데 지금 완장 바꿔 찬 사람들 중에 잘된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열받죠.”
“빼앗긴 선산·회사 찾겠다”
―잃어버린 회사를 찾을 생각은 없습니까.
“선산부터 먼저 찾아야지요. 그 다음에 회사를 되찾아 명예를 회복하겠습니다.”
―회사를 떠날 때 당시 주거래은행 측과 각서라도 받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회사를 살리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어요. 당시에는 말로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각서 써라, 도장 찍어라 하는 생각을 못 했어요.”
―회사를 매각할 때 대응할 수단은 없었습니까.
“대응을 할 엄두를 못 냈죠. 외화 빼돌렸다고 가택수색 들어오고 채권단에서는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 검찰 수사는 계속되지…. 내 코가 석자였어요.”
―1997년 11월 IMF사태가 처음 터졌을 당시 걱정은 안됐습니까.
“내가 리비아 장관을 만나러 파리에 갔을 때 사태가 발생했어요. 리비아 장관이 내게 ‘한국에 IMF가 왔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곧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재무담당 임원이 ‘우리 회사는 괜찮습니다’라고 해요. 귀국해서 자세히 보고를 받았는데 재개발 사업을 하면서 제2금융권에서 빌린 돈 때문에 유동성에 약간 문제가 되겠더라고요. 선친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은행 돈 빌리지 마라’고 하셨는데 결국 그게 당시 정권에 의해 꼬투리를 잡히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 유동성 문제가 권력에 의한 압박수단이 됐던 거군요.
“유동성 위기는 있었지만 IMF 때 재무구조가 튼튼한 회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어요. 리비아 공사대금을 앞당겨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최원석 회장이 1986년 서울 서소문 동아건설 본사를 방문한 요르단 아랍뱅크 쇼만 회장과 환담을 하고 있다. |
―당시 세간에는 리비아 공사비를 제대로 못 받았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공사대금을 원유로 대신 받은 것도 없고 100% 현금으로 다 받았어요. 리비아 정부는 리비아 공사를 전담하는 ‘대수로청’을 설치하고 공사지원을 위한 특별법까지 제정해 최우선으로 대금을 지급해 왔습니다. 우리가 공사비를 청구하면 한두 달 내에 또박또박 현금으로 들어왔어요.”
최 회장은 “리비아 공사비 대목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아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삼일회계법인이 리비아 공사를 조사하면서 공사비를 평균 1년 정도(346일) 걸려서 대금을 받는 것으로 계산했다고 들었어요. 그건 크게 잘못된 겁니다. 리비아 공사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의 공사대금을 어떻게 1년씩 걸려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계산해 보니 공사비를 평균 42일 만에 받아왔어요. 삼일회계법인이 1년으로 계산함에 따라 동아건설의 존속가치가 5000억원이나 저평가됐어요. 당시 삼일회계법인은 존속가치가 1900억원가량 부족하다며 회사를 청산시켜야 한다고 보고서를 썼어요. 5000억원을 저평가해 놓고 1900억원이 부족하다는 건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됩니다. 이미 ‘동아건설 죽이기’로 작정돼 있는 마당에 상식이 통할 리는 없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만 명의 일자리와 설립 50년이 넘은 기업의 운명을 그렇게 쉽게 처리한 건 정말 큰 잘못입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건 언제쯤입니까.
“당시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많이 했는데, 일감이 서서히 떨어졌어요. 공사에 투입된 장비도 많았어요. 그래서 모험을 했죠. ‘활로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입찰소식이 떴습니다. 리비아 측에서는 우리를 보고 ‘양복점처럼 사업을 한다’며 맞춤식 공사에 호의를 가졌던 겁니다.”
1998년 초 40억 달러 유치했으나 金大中 정부가 반대
1998년 2월, 김포매립지에 놀이공원 시설 투자를 위해 방한한 마이클 잭슨과 최원석 회장. |
―당시 우리 정부는 동아건설, 대우건설, 현대건설이 경쟁을 너무 심하게 해서 컨소시엄으로 참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3사 팀들이 모여 태스크 포스를 만들어 같이 하다가 동아건설이 배신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때 리비아 공사 건으로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과 金宇中(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 적이 있어요. 한 그룹이 주체가 돼 일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지요. 관은 현대가, 운반은 대우가, 매설은 동아가 한다는 것은 공사의 특성상 어려웠습니다. 리비아 측에서 우리 회사를 보고 ‘양복점 같다’는 말을 했는데 관을 만드는 동아콘크리트, 관을 운반할 대한통운, 관을 매설할 동아건설이 있어서 그렇게 표현했던 겁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서 수익률은 얼마나 됐습니까.
“처음에는 시행착오와 환차손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에는 상당한 이익을 냈습니다.”
―많이 벌었겠군요.
“원없이 벌어서 잘 썼죠. 달러를 벌어들이는 게 결국 애국 아닌가요.”
―그 많은 돈을 벌었으면서 왜 김대중 정권에는 정치자금을 안 줬습니까.
“그쪽하고는 인연이 안 닿았지. 체질적으로 싫었어요. 그쪽도 우리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나 봐요. 김대중 정부 때 IMF 극복한다고 온 국민이 나서 금반지까지 팔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1998년 2월경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가 김포매립지에 4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는데 김대중 정부가 반대했어요. 손 볼 놈이 잘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 무렵 최 회장께선 부인과의 이혼소송으로 세간에 이미지가 안 좋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외도를 해 놓고 모든 것을 나한테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바람을 피웠어요. 그걸 알고도 모른 체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코너에 몰리니까 ‘찬스는 이때다’ 하고 얼마나 집요하게 공격했는지 몰라요. 여성잡지를 통해서도 공격했어요. 그런데 그런 문제를 가지고 권력이 동아그룹을 없애 버렸다면 정말 큰 잘못이지요. 여자 문제는 동아그룹을 해체하기 위해 교묘히 이용한 것에 불과해요. 당시 동아그룹은 재무구조상 결코 부실이 아니었어요.”
―여자문제와 관련해 주변 시선과 언론보도를 어떻게 견뎌 냈습니까.
“그 무렵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대응을 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어요. 有口無言(유구무언)으로 참고 지냈지요.”
“여자문제 첫 단추 잘못 꿰어”
―시간이 흐르다 보니 미움과 분노도 다 없어졌나 봅니다.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미워해서 뭐합니까. 참는 것도 이제 도가 텄어요. 그 사람이 쓴 책이 盧武鉉(노무현) 정권 초 내가 법정구속될 때 발간됐는데, 구치소에 들어갔더니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책을 돌려 가며 읽고 있더군요.”
최 회장은 이 부분에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여자문제는 첫 단추를 잘못 꿰었어요. 이 나이에 내가 말 못할 게 뭐가 있겠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기업은 기업이고 사생활은 사생활 아닌가요.
“지금 와서 세상에 억울하다고 외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내 운명이다 생각하고 평생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구치소 경험은 어땠습니까.
“겨울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나왔어요. 처음에는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뜨거운 물이 담긴 병을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깨고 나면 꽁꽁 얼어 있더라고. 추운 것을 제일 못 참겠더군요.”
―현재 부인(아나운서 출신 張恩榮씨)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분을 부인으로 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내 상황이 그렇잖아요. 길거리에서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TV에서나 여자를 보게 된 겁니다.”
―지금 사모님도 TV로?
“그런 셈이죠.”
―자제분들이 새 어머니를 잘 따릅니까.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최 회장님은 로맨티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그 말을 내가 사용하면 세상 사람들은 또 오해를 하겠지요.”
―동아그룹과 관련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비교하면 어떻게 다릅니까.
“김대중 정부는 ‘동아그룹을 살리겠다’고 해 놓고 5년 동안 제대로 사업을 하지 않고 결국 자산만 다 팔아 버렸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 일까지 다시 꺼내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더군요.”
―최 회장께서는 대한민국의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가져 왔습니다. 全斗煥(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친분도 두터웠지요.
“5공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청와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최 회장이 갖고 있는 한남동 별장을 좀 써야겠다’는 겁니다. 한남동 별장은 선친 것이라고 했더니 ‘빨리 조용한 곳을 물색해 달라’고 해요. 그래서 ‘기흥에 별장이 있으니 그걸 쓰시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곧바로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 거예요. 시간에 쫓겼는지 돌관공사로 진행했고, 냄새를 없애려고 양파까지 갖다 놓더군요. 청와대식으로 개조를 했는데 엄청 귀한 분이 오는가 싶었죠. 이름도 ‘영춘재’라고 청와대에서 붙였어요. 정문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도 배치를 했고요. 전두환 대통령이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에서 朴哲彦(박철언)씨가 북측 인사 허담을 만나 밀담을 나눴더군요. 그곳에 가끔씩 전두환 대통령도 다녀가곤 했다고 들었습니다.”
全斗煥 대통령과는 코드가 맞았다
1992년 광양제철소 준공식에 참석해 박태준 포스코 회장과 대화하고 있는 최 회장(오른쪽 두 번째). |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코드가 잘 맞았습니까.
“잘 맞았죠. 성격이 시원해서 좋았어요.”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하고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었어요.”
―최 회장께선 16년 동안 대한탁구협회장을 맡는 등 스포츠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유치활동을 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무대에서 정치적으로 입지가 매우 약했어요. 올림픽 유치도 그만큼 힘들었지요. 그래서 기업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유치활동을 주도했어요. 저도 열심히 뛰었습니다. 당시 동아건설이 사우디 TEP 공사를 할 때 네덜란드의 필립스와 스웨덴의 에릭슨과 조인트 벤처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에릭슨의 스위드보그 회장과 필립스의 데커 회장이 IOC위원이었어요. 두 나라는 제가 책임지고 맡았지요.”
―돈도 많이 썼겠군요.
“누가 쓰라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私費(사비)를 털어 유치활동을 했습니다.”
―1980년대는 우리 기업이 급성장하던 때였습니다. 3低(저) 호황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4대 원동력으로 ‘對日(대일)청구권 자금’ ‘월남전’ ‘중동特需(특수)’ ‘3저호황’을 듭니다. 1980년대는 개인적으로나 회사 차원에서나 정말 좋았어요. 해마다 사세가 쑥쑥 커졌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경영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니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비참했지요.”
―한때 경영복귀를 목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남에게 돈을 줬다는 언론보도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사가 나갔는지 저도 모릅니다. 당시 저는 돈을 줄 여력이 없었어요. 솔직히 말해 내가 왜 그쪽 사람들에게 돈을 줍니까. 내 재산 다 가져갔으니 오히려 돈을 받아야지요.”
―후배 기업인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습니까.
“저는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게 하나 있어요. 1998년 5월 정부의 압박으로 주거래은행이 나를 물러나게 했을 때 리비아 정부에 ‘선수금을 먼저 달라’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한 게 정말 아쉬워요.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때 왜 내가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카다피 리비아 지도자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청렴한 분이었어요. 나랑 나이가 비슷한데 40년 동안 정치를 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죠.”
―카다피가 최 회장을 높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사막에서 물을 뽑아 올린다는 걸 아무도 안 믿었는데, 동아건설이 만들어 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나중을 생각해 별도로 준비해 둔 재산은 정말 없습니까.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는데, 빼돌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보통 다른 건설회사들은 임원 명의로 부동산을 사 놓곤 하던데 나는 단순해서 그런 거 못했어요. 나는 거지예요. 아, 그 말은 취소합시다. 거지라고 하면 여자들이 싫어하겠네요. (웃음) 거지여도 있는 척해야 돼.”
―기업을 하면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겠군요.
“우리나라 정말 잘될 거예요. 나는 5대 强國(강국)이 된다고 봐요. 이명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알거든.”
―건설업계 전문가로서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 살기도 어려운데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요즘 또 뭐 세종시? 조상 묘도 제대로 못 챙기는 주제에 4대강이 어떻고 세종시가 어떻고 하면 남들이 욕합니다.”
“‘남의 돈 빌리지 말라’ 하셨는데…”
최원석 회장(왼쪽)은 16년간 대한탁구협회장을 지냈다. 1993년 서울 그랑프리 탁구대회에서 만난 자오즈민과 북한탁구협회 서인생 회장. |
―요즘도 영화 즐겨 봅니까.
“중학교 때부터 공부 안 하고 극장만 다녔어요.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생각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어요.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앞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영화에 꼭 투자하고 싶어요.”
―경영자로서의 기질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선 내가 어떻게 그 큰 기업을 운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선친께 면목이 없어요. ‘남의 돈 절대 빌리지 마라. 줄 돈과 받을 돈은 매일 챙겨라’고 귀가 따갑게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켰잖아요.”
―부친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국 建設史(건설사)의 주역이었습니다. 동아건설과 현대건설은 간척사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우리 회사가 조금 더 우위에 있었지요. 예전에 아산만 공사할 때 폐선을 이용해서 물막이 공사를 한 것이 정주영 현대 회장의 아이디어라고 합니다만, 사실 선친께서 이미 1950년대에 시도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선친께서는 토목기술자였어요. 대천 방조제 공사를 할 때 똑딱선 11척을 가라앉혀 물 흐름을 막아 방조제 공사를 무사히 마무리했지요.
선친께서는 1968년 당시 만성적자 상태였던 국영기업 대한통운을 인수한 후 5년 동안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고생하시다가 고혈압을 얻었습니다. 1985년 세상을 떠나실 때도 과로로 인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지요.”
―그렇게 고생해서 일궈온 동아그룹을 무참히 해체해 버린 세력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뭐,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들이지.”
―다시 태어나도 기업경영을 하실 겁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네. 아유, 모르겠어요.”
“잘나갈 때 겸손했어야”
―옛 동아그룹 임직원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그동안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아 가족에게 내가 무슨 면목이 있다고 할 말이 있겠어요. 나의 부덕함으로 피해를 본 임직원들에게 용서를 바라는 죄인의 심정입니다. 심지어 회사를 떠날 때 일부에서 ‘어려운 때 회사 내팽개치고 자기 혼자 살려고 나간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동아그룹 각 가정의 家長(가장)들이 보람을 갖고 열심히 일하던 일자리가 사라진 것에 대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부디 동아 가족 家內(가내)에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어요. 잘나갈 때 겸손했어야 하는데 내가 그러질 못했어요. 리비아에서도 잘되고, 국내에서도 잘되고 하니까 나 스스로 오만해졌던 거예요. 언제 선산이라도 되찾으면 막걸리나 한 잔 합시다.”⊙
[동아그룹 略史]
국내공사 3800건·해외공사 120건 수주
창립 5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동아그룹은 1945년 최원석 회장의 부친인 故(고) 崔竣文(최준문) 회장이 대전에서 설립한 충남토건이 모체로, 1949년 동아건설로 社名(사명)을 바꿨다. 1950년대 대천방조제 공사, 1960년대 동진강 간척사업 등 주로 간척공사와 농업토목공사를 진행하며 社勢(사세)가 확장됐다.
1968년 만성적자와 경영부실에 허덕이던 국영기업 대한통운을 인수해 5년 만에 경영 정상화를 이뤄내면서 건설·운송 양대 체제로 그룹 골격이 갖춰졌다. 1987년 당시 종업원 3만여 명의 기업군으로 발전했다.
동아건설은 창립 이후 3800건의 국내공사를 진행했고, 1974년 중동에 처음으로 진출한 후 120건의 해외공사를 수행했다. 최원석 회장이 회사를 떠나기 직전인 1997년에는 미국
동아건설은 1990년대까지 총 매출액의 40%를 해외공사가 차지할 정도로 해외부문이 강했다. 해외 특허 2건, 국내특허 44건, 신기술 6건, 知的(지적)재산권 141개를 보유하고 있었고 도로, 항만, 댐, 터널, 원자력발전소, 플랜트공사 등에서 오랜 건설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건설공사 수주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동아그룹은 1970년대 동아건설의 중동진출 성공과 대한통운의 발전에 힘입어 사세가 급신장했다. 동아그룹은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1977년 공산학원을 설립해 대전동아공고를 세웠고, 1990년에는 공산학원 소유의 임야(경남 양산시 소재) 238만㎡(72만 평)를 부산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1996년에는 동아방송예술대학을 세웠다.
동아그룹은 최원석 회장이 물러난 1998년 5월,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됐다. 1998년 9월 구조조정협약에 따라 동아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는 매각한다는 계획하에 동아증권과 서원레저를 매각하는 등 계열사 구조조정작업이 진행됐다. 2000년 11월 동아건설이 부도가 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1년 5월 파산선고를 받아 동아그룹은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됐다.
[김포매립지(現 인천 청라지구)]
공시지가 1조원대 김포매립지 6355억원에 헐값 매각
인천시 서구 경서동·원창동 등 서해안 일대의 김포매립지(인천매립지·現 인천 청라지구)는 1970년대 중반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간척농지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0년부터 1991년까지 11년간 동아건설 자체자금으로 조성했다.
총 공사비 1283억원이 소요됐고, 총 매립면적 3700만㎡(1128만 평) 중 2070만㎡(629만 평)는 1988년 환경청에 수도권 쓰레기 매립장으로 양도됐고, 나머지 1650만㎡(500만 평)는 1991년 1월에 준공·인가됐다. 그중 396만㎡(120만 평)를 국가에 기부채납하고 나머지 1256만㎡(380만 평)는 동아건설 소유로 등기 완료됐다.
김포매립지는 서해안시대의 본격적인 개막과 더불어 수도권 신국제공항건설 및 고속전철, 경인운하 등의 건설로 접근성이 향상됨에 따라 대규모 가용토지로 개발 잠재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동아건설도 김포매립지의 장기개발 구상을 본격화했고 대단위 관광위락단지, 물류단지, 첨단업무단지, 중소기업단지, 주거주택단지 등 대규모 프로젝트 이행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그러나 김포매립지의 용도변경이 늦어지면서 동아건설은 대규모 세금폭탄을 맞았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준업무 무관자산으로 분류해 4년간 총 904억원의 법인세를 물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는 비업무용 토지로 분류돼 3년간 1801억원의 법인세를 내야 했다. 7년간 부과된 법인세가 총 2705억원에 달했다.
동아건설로서는 팔든가 아니면 개발을 통해 이익금으로 세금을 내든가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1998년 최원석 회장이 회사를 떠난 이후 공시지가 1조원대였던 김포매립지는 1999년 6월 정부(농업기반공사) 측에 6355억원(평당 17만원)에 헐값 매각됐다.
2002년 7월 정부는 김포매립지를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지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하고, 김포매립지를 한국토지공사에 넘겼다. 당시 토지공사는 김포매립지를 용도변경해 2005년 11월부터 건설업체에 공동주택단지로 되팔고 있다.
‘인천 청라지구’로 명칭이 변경된 김포매립지는 동아건설로부터 매입한 가격(평당 17만원)의 45배인 평당 800만원대에 매각되면서 언론은 ‘토공이 폭리의 땅장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업무도시로 탈바꿈된 청라지구는 앞으로도 순차적으로 분양될 예정이며, 동아건설이 조성한 옛 김포매립지의 현재 시가는 약 30조원(1250만㎡×800만원) 상당에 이르고 있다.
김포매립지는 동아건설이 보유했던 부동산이었는데 작년 동아건설을 인수한 프라임그룹은 ‘법인세 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해 2008년 10월 옛 동아건설이 낸 세금 중 1996년과 1997년분에 해당하는 법인세 1150억여 원을 돌려받았다.
▣ 동아건설 퇴직 임직원 단체인 ‘東亞建友會’
동아건우회(회장 朴哲陽·사진)는 과거 정부의 동아건설 워크아웃 실패 및 과거사에 대해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지난 4월 청와대와 대법원, 대검찰청,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 다음은 동아건우회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국민소득이 북한보다 낮았던 1972년(GNP 320달러)부터 해외에 진출해 28년간 외화를 벌고, 해외에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국가경제발전에 공헌한 동아건설은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 공중분해됐다. 이에 대한 옳고 그름은 바른 역사와 국가미래발전을 위해서도 밝혀져야 하기에 청원하였다.
우리 국민에게 동아건설은 부실기업이어서 공적자금을 천문학적으로 쏟아붓고 이를 다 낭비한 후 파산되면서 국가와 국민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부실채무기업으로 지난 10년간 왜곡되게 알려져 왔다.
IMF 사태로 유동성 위기에 몰린 동아건설은 정부와 채권단에 맡겨졌고, 기업주의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채권단은 공적자금으로 1조2000억원을 지원하고 16~17%대의 고금리 이자 장사를 하며 자산을 헐값에 매각해 2조5000억원 상당의 원리금(이자 1조2000억원 포함)을 회수한 후 워크아웃을 중단하였다.
2000년도 말 정규직 종업원 2800명과 해외현지 채용인력 5200명 등 총 8000명이 일하던 자산 4조원대의 동아건설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불과 3개월 만에 법원이 직권으로 법정관리를 폐지하고 파산선고가 내려지면서 순식간에 공중분해됐다. 경제적 손실만 10조원 이상에 이르고, 지난 8년간 국내 및 해외현장의 일자리 약 60만 개가 사라졌다.
동아건설 파산으로 리비아 공사는 캐나다·프랑스·일본기업 등으로 넘어갔고, 해외공사 200억~300억 달러 수주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리비아는 동아건설이 17년간 공사를 해 온 건설시장이므로 파산만 되지 않았다면 리비아에서 최소 100억 달러 이상, 여타 중동국가에서 100억~200억 달러 등 적어도 총 200억∼300억 달러 이상의 해외공사를 수주해 국가이익은 물론이고 해외경험과 건설기술이 풍부한 우리 동아건설 퇴직임직원(3만명)에게도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기업이 17년간 피땀으로 개척해 놓은 건설시장을, 그것도 아프리카 최대 産油國(산유국)이면서 세계 8위의 원유 매장량으로 무한한 성장잠재력을 가진 리비아 건설시장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는 행위를 국가권력이 앞장섰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 이를 정당화할 수 있겠으며, 너무나 안타깝다.
동아건설을 억지로 파산시킨 결과 파산채권 배당금액은 6500억원에 불과했고, 이 배당도 리비아에서 클레임 제기로 파산선고 4년이 지나도록 한푼도 중간배당을 하지 못했다.
법원 내부에서도 4년째 중간배당을 하지 못하고 채권자에게 고통만 주는 동아건설 파산절차를 지켜보며 동아건설 파산결정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세월에 묻혀 조용히 지내왔다.
과거 정부(예금보험공사)는 동아건설 파산책임을 동아그룹 전 오너(기업주)와 舊(구)경영진에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이들로 하여금 지난 8년간 수많은 민형사 재판에 휘말리게 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제적·심리적·신체적 고통을 받게 했다.
그간 동아건설 퇴직임직원들은 백방으로 정부 및 사회 각처에 ‘동아건설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했으나 反(반)기업정서가 팽배해 있던 지난 시절 아무도 진실을 규명해 주는 곳이 없었다.
지난해 우리 대법원은 소위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사건’의 30여 년 전 판결에 대해 잘못을 인정한 바 있다. 당시 정권에 밉보여 희생당한 동아건설 문제를 우리 법원이 조금만 공정하게 처리했더라면 10조원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피할 수 있었고, 동아건설도 살아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