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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허운(虛雲) 화상] 3) 화두와 의정(疑情)

머털도사 오경준 2012. 8. 4. 17:54

 

 

   [허운(虛雲) 화상]

   

  3) 화두와 의정(疑情)

 

옛날의 조사들은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했습니다. 저 달마 조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安心)"라든가, 육조 대사의 "오직 견성만을 논한다(唯論見性)"는 것들은 단지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면 되는 것으로서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조사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필사적이지 못하고 거짓 놀음을 일삼으며(多弄機詐), 항상 남의 보배를 헤아려서 자기 집의 보배로 삼는 일(고인의 말씀에 집착하는 것)이 허다함을 보시고, 부득불 제각기 일가를 세우고 솜씨를 발휘하여 학인들에게 화두를 보게 했습니다.

 

화두에는 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든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어떠한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화두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것을 화두(話頭)라고 하는가 화(話)는 말이요, 두(頭)는 말하기 전이니, 저 '아미타불'을 염할 때 '아미타불'하는 말은 화(話)요, 이를 염하기 전이 화두(話頭)입니다. 이른바 화두란 곧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一念未生前之際)'이니,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이미 화미(話尾, 말꼬리)를 이루게 됩니다.

 

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나지 않음(不生)'이라고 하는데, 이 상태는 들뜨지도 않고, 혼침에 빠지지도 않으며, 고요함에 탐착하지도 않고, 공(空)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또 이를 '없어지지 않음(不滅)'이라고 부르는데, 시시각각 또렷또렷하게 일념으로 (마음) 빛을 돌이켜 비춥니다.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不生不滅)'이 바로 '화두를 본다(看話頭)' 혹은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두를 보려면 먼저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화두를 보는 길잡이 입니다. 어떤 것을 의정이라 하는가? 가령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할 때,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자기가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입으로써 염불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마음으로써 염불하는 것입니까? 만약 입으로써 염불한다면, 잠들었을 때 입은 그대로 있는데 왜 염불할 줄 모릅니까?

 

만약 마음으로써 염불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누구인가?'에 가볍게 의심을 일으켜야 하며,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더 좋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이 의념(疑念)을 붙들고 또렷하게 비추어 보되 마치 물이 땅 위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볼 것이며 딴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의념(疑情)이 있으면 달리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없고, 만약 의념이 없으면 가볍게 다시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처음 마음을 쓸 때에는(공부할 때에는) 반드시 고요한 곳(靜中)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움직임 가운데서(動中) 하는 것보다 힘을 얻기가 더 낫습니다. 다만 절대로 분별심은 내지 말아야 합니다. 힘을 얻든 힘을 얻지 못하든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동중이든 정중이든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공부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염불시수(念佛是誰)'라는 네 글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誰, 누구인가?)'자이며, 나머지 세 글자는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누구인가,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은 누구인가라든가,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 누구인가, 혹은 능히 알고 느끼는 이것은 누구인가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주좌와를 막론하고 이 '누구인가(誰)?' 하나를 들면 곧 쉽게 의념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고 헤아릴(思量卜度) 것이 없으니, 이 '누구인가?' 화두야말로 실로 참선의 묘법(妙法)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누구인가?' 혹은 '염불시수?' 네 글자를 가지고 의심하되, 부처님 명호(名號) 부르듯이 한다든지(의심 없이 염불하듯 하는 것), 이리저리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오직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고 찾는 것을 일러서 의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염불시수' 넉 자를 염불하면서 입에 붙이고 다니지만, 그것은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보다 공덕이 더 크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이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 찾고 궁리하는 것을 의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망상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는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로 밑으로 떨어지는 격이니, 올바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념은 아주 거칠어서, 문득 끊어졌다가 문득 이어지며, 금방 익은 듯하다가 금방 설어지니, 의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날뛰던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염두(念頭)에 어떤 덩어리가 잡혀서 머물러 있게 되니, 비로소 참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점차 공부가 무르익으면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 앉아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며, 몸과 마음과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한 덩어리 의념이 현전(現前)하여 간단없이 이어지는데, 이때 비로소 의정(疑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야 어디 공부한다고 하겠습니까? 그저 망상을 제거한다고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면 참의심(眞疑)이 현전하니 비로소 참으로 공부하는 시절이라 하겠습니다. 이 때에 하나의 큰 관문이 있으니, 자칫 잘못하면 다음과 같은 갈림길(샛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①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며 한없이 가뿐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각조(覺照)를 놓쳐버리면 곧 가벼운 혼침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 눈 밝은 이가 옆에 있다면 바로 이 경계에 걸려 있음을 한 눈에 발견할 것입니다. (이 때가 이른바) '향판(香板)으로 내려치니 즉시 하늘의 운무가 걷힌다(一香板打下 馬上滿天雲霧散)'는 것입니다. 흔히 이 때문에 도를 깨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② 또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며 텅 비어 있어서, 만약 의정이 없으면 곧 무기(無記)에 떨어져 마치 죽은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이 앉아 있게 됩니다. 혹자는 이를 일러 "찬물이 돌에 부딪쳐 거품만 인다(冷水泡石頭)"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는 곧바로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하며, 들면 곧 깨어 있어 비추어 보게 됩니다. ('깨어 있다(覺)' 함은 미(迷)하지 않은 것이니 곧 혜(慧)요, '비추어 본다(照)' 함은 어지러움(亂)이 없는 것이니 곧 정(定)입니다.)

 

또렷하면서도 고요한 이 한 생각은, 맑고 고요하게 비추며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고,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으며, 항상 분명하게 지각하니, 찬물에 연기 피어오르듯, 한 줄기로 면면히 이어져 끊이지 않습니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의 눈동자(金剛眼晴)를 갖추어야 하니 다시 화두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화두를 다시 든다면 이는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는 격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에게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니 스님이 말씀하시되, "놓아 버려라."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놓아 버립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되, "놓아 버리지 않으면 도로 메고 가라."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때의 경계(風光)을 말한 것입니다.


이 경계는 물을 마셔 본 사람만이 그 차고 따뜻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아서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경계에 이른 사람은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지만, 여기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 주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않는다(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佛獻詩)'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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